안녕하세요 꿈꾸는 모래시계, 꿈모시입니다.
오늘은 3월, 첫주말에 다녀온 운현궁 그리고 가까이 가지 못한 운형궁 양관 이야기 함께할께요.
지난 1월 종영한 드라마 도깨비.
그 이후 도깨비를 잊게 할 만한 드라마를 찾지 못한 저희 부부입니다.
원래 드라마를 자주 보지 않았는데 집에서 실내자전거를 타면서 못봤던 드라마도 하나씩 챙겨보고
그러다 만난 도깨비!! 아직도 저는 도깨비를 잊지 못하고 있는데요.
아마도.. 많은 분들이 그러시리라 생각됩니다.
그렇게 드라마에 빠져 지내던 지난 겨울,
도깨비집 외관이 운현궁 양관이라는 사실을 알게됐습니다.
그리고 스친 기억하나는 꿈남편과 운현궁에 데이트갔다가 뒷쪽으로 보이는 건물이 이뻐서
저 건물은 뭐지? 그렇게 갸우뚱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사진들을 뒤져 저희가 갸우뚱했던 건물이 도깨비 집이 맞았단 걸 확인했죠.
사실 그건 그냥 그렇구나 했습니다. 어차피 외관뿐이고 언제고 근처 갈일 있음 그냥 들리자 했거든요.
그러나 이 건물이 조선의 마지막 왕자, 이우 왕자가 머물렸던 곳이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외관이라도 보고 싶은 마음에 한걸음 달려갔으나.... 띠로리...
1월? 2월?까지는 많은 분들이 양관을 가까이서 만나신듯한데..
저희가 찾은 3월은 출입이 금지되여 있었답니다. 아마도 드라마의 인기로 인해 찾아오는 분들이 많다보니
현재 덕수궁 양관을 소유하고 있는 덕성여자대학교에서 출입제한 결정을.....
도깨비집이라서가 아니라, 운현궁 양관!! 조선의 마지막 왕자가 머물렸던 곳이며,
백범 김구 선생께서서도 직무실로 사용했던... 곳이기에 너무나 역사적인 장소를 가까이서 보고 싶었는데,
이날, 처음으로 도깨비가 미웠답니다 ㅋㅋ 하지만 드라마 덕분에 운현궁 양관이 더 알려졌고,
더블어 이우왕자에 대한 관심도 많아지기를 기대해봅니다.
*개장시간 및 입장료 안내, 운현궁관련 내용은 공식홈페이와 안내문에서 담아왔습니다.*
운현궁은 조선 제26대 임금인 고종의 잠저(潛邸)이며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집입니다.
흥선군은 이 곳을 무대로 10여 년간 집정하면서 어린 아들을 대신해서 정치를 했으며
권력에서 하야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정치적 영향력을 내외에 행사한 곳으로서
고종이 즉위하기 전까지 살았던 잠저(潛邸)였기 때문에 역사적 상징성이 더욱 큽니다.
고종이 12살까지 살았던 운현궁은 철종 때 옛 관상감 터였던 운현궁에 왕기가 있다는 내용의 민요가 항간에 유행하였으며,
고종이 등극한 후 대원군이 운현궁 터를 다시 확장하였습니다.
흥선군의 사저가 운현궁으로 불리게 된 것은 1863년 12월 9일 흥선군을 흥선대원군으로,
부인 민씨를 부대부인으로 작호를 주는 교지가 내려진 때부터입니다.
운현(雲峴)이란 당시 서운관(書雲觀)이 있는 그 앞의 고개 이름이었으며, 서운관은 세조때 관상감(觀象監)으로 개칭되었으나
별호로 그대로 통용되었습니다. 서운관의 명칭인 운관(雲觀)과 운관 앞의 고개를 가리키는 운현(雲峴)이라는 명칭이 그대로 사용된 것입니다.
1864년 노안당과 노락당을 짓고 1869년(고중6)에는 이로당과 영로당을 세웠습니다.
창덕궁을 쉽게 드나들도록 고종 전용 경근문과 흥선대원군을 위한 공근문을 두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한일강제병합 후 일제는 1912년 토지조사를 실시하면서 대한제국의 황실재산을 몰수하여 국유화하고
이왕직 장관을 시켜서 운현궁을 관리하게 하였으나나 실제로 운현궁을 유지·관리하는 일은 소유권에 관계없이 이로당의 안주인들이 계속 맡아했습니다.
운현궁의 소유권이 다시 대원군의 후손에게 넘겨지게 된 것은 1948년 미군정청의 공문에 의해서인데,
이후 그 소유권을 중심으로 대한민국정부와 대원군 후손 사이에 법적 공방이 있었으나
그 해 9월 21일 결국 대원군의 5대손 이청(李淸, 1936- )씨에게 운현궁 소유권이 확정되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1991년 운현궁을 유지, 관리하는데 여러가지 어려움이 생기면서 양도 의사를 이청씨가 밝힘에 따라 서울시에서 매입하게 되었고,
1993년 12월부터 보수공사를 시작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정비된 것으로 서울특별시 사적 제257호입니다.
노안당은 사랑채로 흥선대원군(1820~1898)의 주된 거처였으며 이곳에서 국정을 논의하기도 하였습니다.
노안은 '논어' 가운데 '노자(老子)를 안지(安之)하며'라는 구절에서 따왔는데 '노인을 공경하며 편안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근데 노안당 내부 사진은... 안 찍고.. ㅋㅋㅋ
ㅋㅋㅋ 노비들이 사용했을 방만.. 찍은... ㅋㅋ
사실 이날 아기들 데리고 사진 촬영하시는 팀이 여러팀이라
기다리고 피해다니며 꼼꼼하게 사진을 못 찍었네요 ^^;;;;
대신 2011년에 찍었던 내부사진 2장을 함께 올릴께요.
운현궁 전각들 내부는 당시를 살펴볼 수 있게 꾸며져 있습니다.
노안당에서 노락당으로 가지 않고 노안당 뒷쪽으로 들어서면,
운현궁 양관을 좀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답니다.
그런데 가깝긴해도 나무들로 인해 그렇게 자세히 보이지도 않는답니다.
양관을 바라보며, 조금만 더 일찍 올껄.. 후회와 ㅋㅋ
이우왕자 이야기를 꿈남편과 나눴답니다.
그렇게 한참을 이야기를 이어가다 다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노락당은 운현궁의 안채로 노안당과 같은 해인 1864년(고종 1)에 지어졌습니다.
운현궁 안에서 유일하게 기둥머리에 익공을 장식하여 가장 높은 위계를 드러내고 있는데요.
여러 세부기법은 조선 말기 궁궐건축에 버금가는 수법으로
1866(고종 3) 고종과 명성황후는 노락당에서 가례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운현궁 양관을 그래도 가장 잘 볼 수 있답니다.
여기서 운현궁 양관 이야기와 이우왕자 이야기를 함께 하겠습니다.
운현궁 양관은 1912년 일제가 왕족을 회유하기 위해 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에게 지어준 것이라고 합니다.
이준용은 고종황제의 형 흥친왕 이재면의 아들로 영선군의 작위를 받습니다만
아버지 흥친왕이 이희공으로 강등된 후 죽자 준(埈)으로 개명하고 공(公)의 지위를 상속 받았습니다.
운현궁 양관은 '이우공저'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1917년 이준이 죽은 뒤
순종의 아우인 의친왕의 둘째아들 이우가 이어 받아 지냈기 때문이랍니다.
일본에 볼모로 잡혀있던 그가 일본에서 돌아올때면 양관 2층에서 책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고 하는데요.
바로 그 곳을 백범 김구 선생님도 직무실로 사용하셨으니 그 역사적인 가치가 정말 큽니다.
이우 왕자는 의친왕의 차남으로 1912년에 태어났습니다.
독립선언서 33인에 조선 왕족으로서는 유일하게 이름이 올라가 있었던 의친왕 이강.
그런 아버지를 닮아 총명하였으며 수려한 외모로 조선 왕족으로 위엄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일본에 매우 적대적이였는데 일본에서 보낸 유년시절 일본인들과 마찰이 자주 일어났으며
일본말은 잘 사용하지 않고 대부분 조선말을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일본이 일본백작 야나기사와 야스쯔구의 딸과 결혼을 시켜려하자 일본인과 결혼할 수 없다고 강하게 반발하였고
결국 친일파 박영효의 서손녀 박찬주와 결혼했는데 친일파와 결혼을 하였지만
당시 일본인과 결혼하지 않은 황손은 이우왕자가 유일했습니다.
1929년에 일본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 군인의 길을 걷게 된 그는 일본군 정보 참모라는 직위를 통해
수집한 내용을 독립군에게 넘겨주는 등 독립군의 든든한 후원자이자 정신적 지주로 활동했다고 합니다.
후에 중국 태원에서 근무하는 동안 나라에 대한 애국심으로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일본과의 전투를 계획하지만
이를 눈치챈 일본이 이우 왕자를 교육참모로 보직을 바꾸고 히로시마로 발령을 냅니다.
그러나 이를 따르지 않고 운현궁으로 돌아와 전출을 거부하며 자신의 계획을 다른 방향으로 실현시키고자합니다.
끝내 뜻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고 히로시마로 간 이우 왕자.
그리고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으로 부상을 입게 되여 병원으로 후송 되였으나 그의 나이 34세로 생을 마감합니다.
또 안타까운 일은 그의 장례식이 치뤄진 날은 8월 15일.
일본의 패망선언을, 조국의 해방을 죽어서야 듣게 됩니다.
영화 '덕혜옹주'에 고수가 역을 맡아 큰 관심을 받은 이우왕자.
사실 그가 독립운동을 하였다는 내용은 정확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독립에 대한 민족의식이 매우 강했으며 일제의 지시에 저항을 많이 했던 분입니다.
조선인에게는 따뜻하고 일본인에게는 차갑고 냉정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술자리에서 일본 총독부가 금지곡으로 정한 '화성 옛터'를 불렸던 이우왕자.
저는 운형궁 양관을 보며 도깨비보다는 이우왕자가 더 생각났습니다.
도깨비 공유보다는 이우왕자와 백범김구 선생을 생각하며 부부셀카♥
이로당은 노락당과 함께 운현궁의 안채로 쓰였습니다.
이로(二老)는 흥선대원군과 부대부인 여흥 민씨를 의미하는 말로 해석합니다.
앞쪽에 자리한 노안당과 노락당보다 뒤늦은 1869년에 지어졌습니다.
이로당에 서 바라본 운현궁 양관.
어느 순간부터..(사실.. 처음부터 ㅋㅋㅋ) 운현궁보다는 양관을 중심을 찍고 있는 저입니다.
가까이 다가가지 못함을 사진 중심으로 담음으로써 표현하기!! ㅋㅋ
그렇다고 운현궁 나들이에 소흘히 하지 않았답니다.
다른 궁에 비해 규모가 작기 때문에 확실히 여유로운 역사나들이.
여기서도 ... 왜 양관이 더... 눈에 보이는지 ㅋㅋㅋㅋ
운현궁 양관 집착사진들 ㅋㅋㅋㅋ
정말 너무나 오랜만에 꿈모시 꿈남편의 과거 사진 공개입니다.
운현궁을 꿈남편과 함께 찾은 마지막은 2011년입니다. 이후는 저 혼자 다녀왔었는데요.
바로 이 문에서 찍었던 사진이 떠올려 문 한쪽씩 자리를 잡고 사진을 찍었답니다.
기억속에서는 제가 왼쪽 꿈남편이 오른쪽이였는데... 그래서 그렇게 찍었는데....
집으로 돌아와 확인해 보니 .. 아니였답니다. ㅋㅋㅋ
위치를 반대로..... 찍었네요 ㅋㅋㅋ
5년 전, 참 어렸네요. 그때도 그렇게 어린 건 아니였는데도 지금 모습과 비교하니 그래요.
지금은 풋풋함도 없고 체력도 떨어지고 눈가에 주름도 생겼지만....
그래도 다행인 건 저희가 함께이며 앞으로도 평생을 함께할 부부라는 것이겠죠?
삼각대를 가져갔어야했는데!! 운현궁은 다른 궁에 비해 워낙 여유가 있기에,
삼각대 안 가져 간것을 엄청 후회했습니다.
다음엔 꼭 가져가서 이쁜 커플 사진 찍으렵니다.
그리고 운현궁 한쪽에 닥종이 인현전시회를 진행중이라 구경했답니다.
닥종이 인형은 볼때마다 신기하기도 하고 참 이뻐요!!!
사물놀이 표정이 너무나 귀여워서 한참을 구경했습니다.
왕실문화의 전당, 운현궁.
곧 운현궁에서도 봄꽃 소식이 들려오겠죠?
그 소식에 맞춰 나들이 다시 나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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