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

영월) 청령포/단종의유배지

꿈모시 2014. 10. 29. 00:33
오늘은 10월11일, 영월여행 첫째날 세번째일정 청령포 이야기 함께해요. 

영월 청령포의 관람시간은 오전 9시에서 오후 6시(입장시간은 오후5시까지)이며, 관람요금은 성인 2,000원 청소년,어린이,군인 1,200원, 주차비는 무료입니다.

청령포는 배를 타고 들어갈 수 있는데요 입장표에 배이용도 포함이에요.
배는 상시로 운행하고 있으며 한대만 운행하다가 사람이 많아지면 두대를 함께 운행합니다.

청령포에 가기전에 먼저 장릉을 들렸던 터라, 뭔가 마음이 더욱 엄숙해진다고 할까요?

강의 폭은 얼마되지 않으나 깊이는 꽤 되는거 같더라구요. 강을 건너며 이곳으로 유배를 가던 단종의 모습을 상상해봤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강은 유난히 더 깊고 깊어 보였어요.

장릉 포스팅에서 단종에 대한 이야기 전해드렸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단종은 1441년 7월23일(세종 23년)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 사이에서 원자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홍위(弘暐)입니다.
8세가 되던 1448년(세종 30년)에 왕세손에 책봉되었고, 예문관제학 윤상으로부터 학문을 배웠습니다.
1450년 2월(세종 32년)에 세종이 승하하고 문종이 즉위하게 되자 그 해 7월 20일 왕세손이었던 홍위는 10세의 나이로
왕세자로 책복되었으며, 1452년 5월 18일 문종이 승하 후 단종은 경복궁 근정전에서 12세의 어린나이로 제 6대 왕에 즉위합니다.
 
계유정난(癸酉靖難) 이 후 1455년 6월 11일 단종은 숙부인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15세에 상왕이 되었으며
박팽년, 성삼문 등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모두 죽임을 당하는 사육신사건이 일어나
1457년(세조 3년) 노산군으로 강봉된 뒤 1457년 윤 6월 22일 궁을 떠나 윤 6월 28일 유배지인 영월 청령포에 도착했습니다.
그해 9월 금성대군 유(瑜)가 다시 그의 복위를 꾀하다가 사사되자 단종은 노산군에서 서인으로 내려지고
뜻밖의 큰 홍수로 강물이 범함하여 청령포가 물에 짐기게 되자 영월 동헌의 객사인 관풍헌으로 처소를 옮겼습니다.
결국 죽음을 강요당해 1457년 10월 24일 유시에 17세의 어린 나이로 관풍헌에서 승하하였습니다.
 
*모든 내용은 청령포 안내책자를 담아왔습니다.

    

배를 타고 들어가면 울창한 거송들이 들어선 수림지(천년의 숲 지정)를 먼저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단종어소입니다. 승정원 일기의 기록에 따라 기와집으로 그 당시의 모습을 재현한 곳입니다.

  

어소에는 당시 단종이 머물던 본채와 궁녀 및 관노들이 기거하던 행랑채가 있으며 밀납인형으로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단종어소 앞쪽에 있는 단묘재본부시유지비는 1763년 세워진 것으로 총 162cm 오석으로 제작되었는데,
앞면에는 端廟在本府時遺址(단묘재본부시유지/단종이 이곳에 계실 때의 옛터이다)라는 글이 영조대왕의 친필로 음각되어 있고
뒷면에는 '영조 39년 계미년 가을 울면서 받들어 쓰고, 어명에 의하여 원주감영에서 세웠다 지명은 청령포이다'라고 기록되여 있다고 합니다.

 

  

1988년 천연기념물 제 349호로 지정된 관음송입니다.
단종이 유배생활을 할때 두 갈래로 갈라진 이 소나무에 걸터앉아 쉬었다는 전해집니다.
또한 단종의 유배 당시 모습을 보았으면(觀), 때로는 오열하는 소리를 들었다(音)는 뜻에서 관음송(觀音松)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수령은 600년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는 단종 유배시의 수령을 60년으로 하여 계산한 것입니다. 

 

  

청령포는 동,남,북 삼면이 물로 둘러싸이고 서쪽으로는 육육봉이라 불리는 험준한 암벽이 솟아 있어
나룻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밖으로 출입할 수 없는 마치 섬과 같은 곳입니다.
이 적막한 곳에서 외부와 두절된 유배생활을 한 단종.
호장 엄흥도가 남몰래 밤이면 이곳을 찾아 문안을 드렸다고 전해집니다.

청령포 뒷산 육육봉과 노산대 사이 층암 절벽 위에 있는 망향탑은 단종대왕이 자신의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근심속에서도
한양에 두고 온 왕비 송씨를 생각하며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막돌을 주워 쌓아 올렸다는 탑으로 단종이 남긴 유일한 유적입니다.

 

  

금표비는 단묘재본부시유지 북쪽에 있습니다. 앞면에는 청령포금표(淸泠浦 禁標)라고 쓰여 있으며,
뒷면에는 東西三百尺 南北四百九十尺 此後泥生亦在當禁 (동서삼백척 남북사백구십척 차후니생역재당)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동서로는 300척, 남북으로는 490척과 이후 진흙이 쌓여 생기는 곳 또한 출입을 금지한다는 내용입니다.
측면에는 崇禎九十九年(숭정 99년)이라고 음각되어 있습니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서 울어 밤길 예 놋다.

금부도사 왕방연이 단종께 사약을 진어하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비통한 심정으로 청령포를 바라보면서 읊은 시조.